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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

by 파워뷰티 2025.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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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 그러나 그가 정말 우리가 아는 위인이 맞을까? 전쟁 참여, 인종차별 발언, 여성과의 기행, 그리고 동성애 논란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간디의 어두운 진실에 대해 낱낱이 파헤쳐본다.

간디

신격화된 인물, 그러나 그 뒤에 감춰진 이중성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아버지로 불리며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생일은 인도의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화폐에도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도 이름을 올릴 정도죠. 그는 영국에 맞선 비폭력무저항 운동으로 인도의 독립을 이끈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과서에 담긴 그의 이미지는 한 면에 불과합니다. 간디는 출세욕이 강한 인물이었고, 그 열망은 차별을 용인하면서도 성공을 향한 발판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드러났습니다. 그의 유년기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영국은 카스트 제도를 부활시키며 계급 간 갈등을 조장했는데, 이는 하층민들에게 오히려 교육과 일자리라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간디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남아프리카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기차 안에서 겪은 인종차별로 인해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 계기를 맞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아는 간디의 정의감의 시발점처럼 보이지만, 곧 이어진 그의 행적은 오히려 의문을 낳습니다. 제2차 보어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자원해서 영국군의 후송 임무에 참여했고, 심지어 영국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도 그는 자발적으로 영국군 지원을 호소하며 인도 청년 150만 명을 전쟁터로 이끌었습니다. 이는 비폭력을 외치던 그가 실질적으로는 폭력적 전쟁에 간접 가담했다는 점에서 모순되는 행동이었죠. 당시 그는 영국에 협조하는 대가로 인도의 독립을 기대했으나, 이는 그가 민족주의자가 아닌 협상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방증합니다.

인종차별과 카스트 옹호, 불편한 정치적 신념들

간디는 인종 평등과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메시지를 세계에 전한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남긴 인물로도 평가받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하던 당시 그는 흑인들을 카피라 불렀고, 인도인은 아프리카 원주민보다 우월하다고 말한 기록이 존재합니다. 심지어 그는 백인 우월주의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간디의 손자 역시 할아버지는 흑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기록들로 인해 2016년, 아프리카 가나 대학에 세워진 간디의 동상은 철거 청원이 잇따랐고, 결국 2018년 학생과 교수들의 손에 의해 철거됐습니다. 한편, 간디는 인도의 뿌리 깊은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비판하기보다는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불가촉천민(달리트) 출신이자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인 암베드카르는 카스트 제도를 폐지하고, 불가촉천민들에게 별도의 선거권을 부여하자는 법안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이를 반대하며 사랑으로 천민을 대하면 된다며 현실적인 대안 없이 이상론만 펼쳤습니다. 그는 불가촉천민을 신의 아이라는 의미로 하리잔이라 부르자는 캠페인을 벌였지만, 이는 삶의 질을 바꾸는 실질적인 변화가 아니었고, 천민들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더 나아가 간디를 따르는 일부 힌두교 단체들은 불가촉천민들에게 보복을 가하는 폭력 사건까지 저질렀습니다. 평등과 비폭력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차별을 고착화시키고 외면한 간디의 모습은 오늘날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신격화된 존재로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그의 사상은 특정 계층의 입장에서만 정의롭고 평화로운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여성과의 기행, 동성애 의혹 간디의 어두운 사생활

간디는 성자처럼 묘사되지만 그의 사생활은 그와 거리가 멉니다. 간디는 결혼 후 아내와의 잠자리를 가진 날,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금욕을 맹세했으나, 수행이라는 명분 아래 수상한 행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어린 여성들과 함께 잠을 자며 이를 욕망을 이겨내기 위한 수련이라 주장했지만,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여성 중에는 손녀뻘 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간디의 몸을 덥혀주는 역할을 했다고 하며, 이러한 비정상적인 수련 방식은 당시에도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린 소년, 소녀들과 함께 목욕을 시키며 성적인 유혹을 이겨내는 시험을 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이는 오늘날 성적 학대나 아동학대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간디는 내 몸은 흥분했고, 수치심이 들었다는 말을 남기며 모순된 감정을 드러냈고, 한 여성에게는 위험한 정글을 지나 심부름을 시키며 만약 네가 죽음을 맞았다면 기쁘게 여겼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일화들은 뉴욕타임스 편집장 출신 작가 조지 풀리의 책 《위대한 영혼》에 자세히 소개돼 있습니다. 이 책에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이 실려 있는데, 간디가 동성애 성향을 가졌다는 주장입니다. 13세에 결혼하고 4명의 자녀를 둔 간디는 1908년, 남아공에서 유대계 건축가 칼렙 바우와 함께 동거하며 연인 관계를 맺었다는 내용입니다. 간디는 너는 내 몸을 완전히 소유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겼고, 침대 머리맡에 칼렙의 사진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는 극도로 부도덕하다고 여겨졌던 일로, 그의 인물상에 큰 충격을 주는 부분입니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간디에 대한 미화와 편집은 교육과 정치의 도구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간디는 어쩌면 가르치기 좋은 인물로 만들어진 허상일 수 있습니다. 이제는 그의 진짜 모습을 더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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