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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만든 최고의 미인’ 브리지트 바르도

by 파워뷰티 2025.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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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70년대 프랑스를 넘어 세계를 사로잡았던 ‘신이 만든 최고의 미인’ 브리지트 바르도. 금발의 요정, 육감적인 몸매, 도도하면서도 무심한 눈빛으로 수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녀는 섹스 심벌이자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결코 화려한 외면처럼 아름답기만 하진 않았다. 네 번의 결혼, 수차례의 자살 시도, 불안정한 모성애와 대중에 대한 환멸.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은퇴 이후의 삶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편에 존재하던 또 다른 그녀의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브릿지 바르도

1. 엄격한 집안과 반항적인 첫사랑, 여신의 탄생

브리지트 바르도는 1934년 9월 28일, 파리 15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외모로 주목받았던 그녀는 엄격한 가정교육 아래 자랐고, 아버지의 권위적인 태도와 보수적인 환경 속에서 억눌리며 성장했다. 7살에 발레를 시작해 13살에는 프랑스 국립발레단에 들어갈 만큼 촉망받는 발레리나였지만, 그 이면에는 부모의 기대에 눌려 ‘완벽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따랐다. 실제로 여동생과 함께 꽃병을 깼다는 이유로 20대의 회초리를 맞았다고 회상하며, 바르도는 성장 과정에서 받은 감정적 고립이 평생 자신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10대 후반, 패션 모델로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15세 때 <엘르> 잡지의 표지 모델로 등장하며 본격적인 대중적 주목을 받는다. 1950년, 이 화보를 본 영화 관계자들이 그녀를 로저 바딤 감독에게 소개하면서 두 사람의 운명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아직 미성년자였던 바르도는 바딤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의 압박 속에서 첫 자살 시도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다행히 부모의 빠른 발견으로 생명을 건진 바르도는, 결국 18세 생일 이후 바딤과의 결혼을 허락받는다. 이 결혼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고, 바딤은 그녀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조력자이자 첫 남편으로 남는다.

1956년, 남편 바딤이 연출한 영화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는 당시 가톨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고, 선정성 논란과 함께 전 세계적인 흥행 대박을 기록했다. 이 영화는 브리지트 바르도를 세계적 섹스 심벌로 등극시키며, 프랑스 여성의 대담함과 성적 해방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특히 칸 영화제에서 수영복을 입고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은 파격적이었고, 이후 그녀에게는 수많은 영화 제안과 미디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바르도는 대중의 기대와 압박 속에서 점점 더 내면의 공허함과 외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그녀의 매혹적인 눈빛과 육감적인 몸매 뒤에는, 어린 시절부터 억눌린 감정과 정서적 불안정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사랑, 결혼, 그리고 모성 결핍… 바르도의 복잡한 사생활

브리지트 바르도의 사랑은 언제나 격정적이었다. 공식적으로 4번의 결혼과 100명 이상의 연인이 있었다고 알려질 정도로, 그녀는 사랑에 쉽게 빠지고 쉽게 질리기를 반복했다. 첫 남편 바딤과의 결혼도 5년 만에 끝났고, 그 사이 그녀는 공동 주연을 맡은 배우들과 끊임없이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자크 샤리에와의 관계는 매우 극적이었다. 영화 바바렐라를 촬영하며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급하게 결혼하고, 1960년에는 아들 니콜라스가 태어난다. 그러나 바르도는 아들을 반기지 않았고, “아이보다 개를 낳고 싶었다”고 회고할 만큼 모성애가 결여되어 있었다.

아들과의 관계는 냉랭했다. 바르도는 출산 후 불과 6주 만에 촬영장에 복귀해 새로운 연인과 또다시 열애설을 일으켰고, 아이는 아버지 자크가 전담해서 양육하게 된다. 나중에 아들 니콜라스가 결혼할 때도 바르도를 초대하지 않았으며, 성인이 된 뒤에도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바르도의 자서전에서 아들을 ‘악성 종양’이라고 표현한 대목은 큰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자크 샤리에는 명예훼손으로 그녀를 고소해 손해배상을 받게 된다. 후일 바르도는 자신이 ‘엄마 자격이 없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모든 근본 원인은 사랑받지 못한 유년 시절과 가정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 밝혔다.

이후에도 그녀는 독일 재벌 군터 작스와 결혼하며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작스는 헬리콥터로 장미 1만 송이를 집 앞에 뿌리며 프러포즈를 한 낭만의 주인공이었지만, 이 결혼도 오래가지 못해 3년 만에 파국을 맞는다. 바르도는 30대 후반까지도 여전히 아름다웠고, 카메라 앞에서의 매력은 살아 있었지만, 그녀는 점점 더 세상과 멀어지고 싶어 했다. 대중의 사랑이 클수록, 그녀는 더 불안해졌고, 자주 자살 충동을 느꼈다. 결국 1973년, 38세의 나이에 그녀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등진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녀의 이름은 계속해서 언론의 이슈가 되었고, 바르도는 사생활에 대한 집요한 관심에 피로감을 느끼며 점차 세속적인 삶에서 멀어지게 된다.

3. 스포트라이트 뒤편, 동물과 함께한 진짜 삶

배우로서의 활동을 접은 이후, 브리지트 바르도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인간에게 받은 상처와 실망을 안고, 그녀는 오롯이 동물 보호에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어릴 적, 애지중지하던 토끼가 식탁 위 요리로 올라온 경험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고, 이는 후일 그녀가 동물권 보호에 극단적인 헌신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개고기 식용 반대 운동을 선도했으며, 많은 프랑스인들의 식문화 인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동물을 가족 이상으로 생각했으며, 자식보다 개를 더 아끼는 모습은 언론의 조롱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녀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었다.

1983년에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지만, 처음에는 치료를 거부하려 했다. 결국 가족의 설득으로 치료를 받았고, 완치 이후에도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관절염, 만성 통증 등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지만, 그녀는 끝까지 동물들을 돌보며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다. 1992년, 레스토랑에서 만난 사업가 베르나르 도르말과 네 번째 결혼을 했고, 현재까지 함께 지내며 조용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언행은 종종 극우적인 성향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슬람 혐오 발언, 동성애에 대한 비판, 매춘 여성에 대한 공개적인 혐오 등으로 인해 법적 제재를 받았고, 실제로 벌금형도 수차례 선고받았다. 한때 프랑스를 대표하던 ‘미의 여신’이 어느 순간 ‘극우 노인’으로 비치게 된 것은 안타까운 변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도는 여전히 자신이 믿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고, 동물에게만큼은 진심 어린 천사로 남아 있다.

그녀는 “화려한 명성과 작별한 후에야 진짜 나를 찾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이 사랑한 동물들과 함께 조용한 삶을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스포트라이트를 떠나 홀로 선택한 고독한 삶, 그것이야말로 브리지트 바르도의 마지막 아름다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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