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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매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패셔니스타, 에디 세즈윅

by 파워뷰티 2025.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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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패셔니스타, 에디 세즈윅. 앤디 워홀의 뮤즈이자 팩토리걸로 불린 그녀는, 상류층의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정신적 상처와 마약, 사랑의 상처 속에서 짧은 생을 불태웠습니다. 아름다웠지만 너무 연약했던 한 여성의 슬픈 초상입니다.

에디 세즈윅

🌟 유리같이 깨지기 쉬운 상류층의 딸, 에디의 어린 시절

에디 세즈윅은 1943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에서 상류층 명문가의 7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독립선언문 서명자와 미국 대학 설립자 등이 있는 미국 건국 공신 가문으로, 명문 중의 명문이었죠. 그러나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그 안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정신 질환과 신체 질환을 동시에 앓았고, 어머니 역시 심각한 대인기피증과 집착적인 성향을 보였습니다. 의사들은 이 부부에게 아이를 갖지 말라고 했지만, 그들은 8명의 자녀를 낳았고, 양육은 유모와 가정교사에게 맡긴 채 방임했습니다.

에디는 이 왜곡된 환경 속에서 자라나며 어린 나이부터 거식증을 앓기 시작합니다. 특히 13세 무렵에는 기숙학교에 입학하지만 건강 문제로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외도 현장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는 충격받은 딸을 폭행하며 "거짓말쟁이"로 몰았고, 이 사건은 에디의 정서에 깊은 흉터를 남깁니다. 이후 그녀는 정신 병원에 입원하며, 외부 세계와 단절된 삶을 살게 되죠.

그녀의 두 오빠들 역시 정신질환과 중독 문제로 고통받았고,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맞습니다. 한 명은 게이라는 사실을 밝힌 직후 자살하고, 또 다른 오빠는 아버지에게 “너는 다른 사람에게 해만 끼친다”는 말을 듣고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했죠. 에디는 이 사건 역시 자살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처럼, 그녀의 유년 시절은 부유했지만, 사랑이나 안정과는 거리가 먼 지옥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평생 그녀의 내면을 뒤흔들게 됩니다.

👠 패션 아이콘이 된 파괴적 뮤즈, 팩토리걸 에디

1964년, 에디는 모델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뉴욕으로 이주합니다. 재즈 발레를 배우기 위해 시작한 생활 속에서, 그녀는 바지를 벗고 스타킹만 입는 '팬츠리스 룩'을 선보이며 패션계의 주목을 받게 되죠. "왜 꼭 바지를 입어야 하죠?"라는 그녀의 말은 새로운 자유의 상징이 되었고, 젊은 세대는 이 독특하고 대담한 스타일에 열광했습니다. 에디는 그 시점부터 '60년대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 무렵, 에디는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되고, 곧 그의 뮤즈이자 팩토리의 중심 인물로 떠오릅니다. 워홀은 에디의 아름다움과 파괴적인 사생활에 매료되어 그녀를 단편영화에 출연시키며 ‘팩토리걸’의 아이콘으로 만들죠. 하지만 워홀은 그녀에게 정당한 금전적 보상을 하지 않았고, 에디는 그의 예술적 실험의 '도구'처럼 소비되고 있음을 점점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삶은 점점 더 파괴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술, 약물, 그리고 밥 딜런과의 연애는 그녀를 더욱 무너지게 만들었고, 밥 딜런이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앤디가 전하며 충격은 극에 달합니다. 이 사랑의 배신과 워홀과의 거리감은 에디를 급속히 무너지게 만들고, 그녀는 재활센터를 전전하게 됩니다. 예술가들에게는 뮤즈였지만, 정작 에디 자신은 점점 더 무너져가던 셈입니다.

🖤 빛보다 짧았던 생, 그리고 28년의 아름다운 잔향

에디 세즈윅은 1971년, 재활 시설에서 만난 8살 연하의 마이클 포스트와 결혼하며 잠시나마 안정된 삶을 꾸려갑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뿐. 그해 11월, 산타바바라에서 열린 패션쇼 파티에 참석한 에디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합니다. 사인은 바르비튜르산염 계열의 진통제 및 수면제 중독이었으며, 이 약은 그녀가 '헤로인 중독자'라는 소문에 시달리던 가운데 의사에게서 처방받은 것이었습니다.

죽기 전날 파티장에서, 한 손금 전문가는 그녀의 끊어진 생명선을 보고 놀랐고, 에디는 "괜찮아요, 알고 있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마치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한 이야기로 남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상처입은 삶의 필연적인 종말처럼 느껴지죠.

에디는 죽은 이후에도 많은 아티스트들의 영감의 원천으로 남았습니다. 그녀는 "이상적인 존재"로 여겨졌고, 한편으로는 '위험한 여자'로 낙인찍힌 존재였습니다. 부모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고, 대중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예술가들에게는 살아있는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녀 스스로는 끝까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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