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역사상 가장 논란 많은 황제, 네로. 그는 폭군이었을까, 억울한 희생양이었을까? 로마 대화재의 범인이라는 오명을 쓴 그가 실제로는 도시 재건에 힘썼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콜로세움의 숨겨진 진실과 함께 네로의 진짜 모습을 파헤쳐본다.
성장배경
네로는 기원후 37년, 로마 황제 칼리굴라의 여동생인 아그리피나와 귀족 출신 아헨오바르부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헨오바르부스로,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귀족 출신으로 자랐다.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아들 네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막강한 정치적 야망을 드러냈다. 그녀는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해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삼게 했고, 결국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후계자가 되었다. 17세에 황제가 된 네로는 처음에는 스승 세네카와 어머니의 조언을 받아 비교적 온건한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욕이 커졌고,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에 불만을 품게 된다. 결국 그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아내 옥타비아를 제거하면서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해나갔다. 어린 시절부터 권력 중심에서 자란 네로는 타고난 지도자라기보다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황제였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훗날 폭군으로 평가받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결혼 후 삶과 죽음
네로는 어린 나이에 로마 황제로 즉위한 이후, 점차 권력을 장악하며 독재적 통치를 이어갔다. 초기에는 세네카와 부리부루스 같은 조언자들의 조언에 따라 비교적 온건한 정치를 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들마저 제거하고 전제 정치로 나아갔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아내 옥타비아까지 살해하면서 무자비한 면모를 드러냈다. 특히 네로의 폭군 이미지를 굳힌 사건은 로마 대화재였다. 64년 여름, 로마 시내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해 도시 절반이 불탔다. 당시 많은 이들이 네로가 불을 질렀다고 믿었으며, 불길한 소문은 "네로가 화재를 바라보며 리라를 켜고 노래했다"는 이야기로 확대되었다. 그는 혐의를 벗기 위해 기독교인들에게 누명을 씌우고 잔혹한 박해를 감행했다. 십자가에 묶은 기독교인에게 기름을 부어 밤의 가로등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잔인함의 대명사로 회자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네로가 화재 당시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재난 소식을 듣고 즉시 돌아와 이재민을 구제하고 도시 재건에 힘썼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그는 도시의 배수 시스템과 수로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재건 과정에서 개인 궁전을 과하게 지은 탓에 민심은 점차 등을 돌렸다. 원로원과 갈등을 빚은 네로는 정치적 음모에 시달렸고, 결국 반란이 일어나자 황궁을 떠나 도망쳤다. 68년, 네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닫고 자결했다. 죽기 직전 그는 "어떤 예술가가 죽는가!"라고 외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의 죽음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네로황제 사후
네로가 자결한 이후, 로마는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으며 '네 해의 황제'라 불리는 권력 공백기를 맞이했다. 그가 죽자 시민들 사이에서는 놀랍게도 네로를 그리워하는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화려한 공연과 빵을 나눠주며 민중의 환심을 샀던 점, 재건 사업에서 보여준 실용적 행보들이 다시 조명된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네로가 죽지 않았다고 믿었고, 그가 다시 돌아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를 바탕으로 네로를 신격화하거나 예언 속 인물로 보는 종교적 해석도 등장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폭군, 미치광이 황제의 이미지가 더욱 강하게 남았다. 원로원과 사가들은 그를 부정적으로 기록했으며, 기독교 박해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언급되었다. 특히 로마 대화재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그의 평판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독일 작가와 일부 역사학자들은 타키투스의 기록을 근거로 네로가 억울한 희생양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마가 남긴 기록물은 비교적 사실에 근접한 편이지만, 권력 투쟁과 정치적 음모 속에서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현대에는 네로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도 있으며, 폭군이라는 이미지 뒤에 가려진 인간적인 면모와 정치적 상황을 함께 조명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로마 제국의 마지막 클라우디우스 황제로서, 네로는 역사 속에서 여전히 복합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