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클린 케네디는 단지 대통령의 아내를 넘어, 미국 역사상 가장 우아하고 상징적인 퍼스트레이디로 기억됩니다. 패션과 언어, 지성, 품위를 모두 겸비한 그녀는 시대의 아이콘이자 전 세계 여성들의 롤모델이었습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되짚어봅니다.
1. 명문가의 딸로 태어난 패션 아이콘, 어린 시절과 성장
재클린 리 부비에는 1929년 뉴욕 사우샘프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월스트리트에서 활동하던 주식 중개인이자 외모도 훌륭했던 인물로, 딸에게 남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을 조언하며 최고의 여성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어머니는 탁월한 승마 실력을 지닌 여성으로, 어린 재클린에게 말 타기와 품위 있는 태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런 환경 덕분에 재클린은 1살 때부터 말을 타기 시작했고, 11살에는 전국 대회에서 우승하며 운동신경도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더 좋아했던 것은 책 읽기였습니다. 그녀는 학문과 문화, 그리고 예술에 몰입하며 남다른 지성과 감성을 키워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부모의 이혼은 당시 기준으로도 드물고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어린 자매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으로 변했습니다. 아버지는 무책임했고, 재산을 탕진하며 가족에게 경제적 불안을 안겼습니다. 어머니는 이혼 후 부유한 투자 은행가와 재혼했지만, 그에게는 이미 아이들이 있었고 재클린과 여동생은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재클린은 고요와 독서를 즐기며 내면을 다듬어갔습니다. 그녀는 코네티컷의 명문 미스포터 여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고, 이후 바사 칼리지와 소르본 대학에서 프랑스어와 예술, 문학을 공부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습니다.
이처럼 재클린은 단지 ‘예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학문적으로도 성취가 높았고, 교양 있는 지성과 말솜씨를 갖춘 여성이었으며, 고급 취향을 일상에 녹여내는 ‘살아 있는 예술품’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녀가 단지 정치인의 아내나 사회계 여성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 여성들에게 우아함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2. 케네디의 아내로, 세계가 주목한 영부인의 삶
재클린은 대학 시절부터 이미 사교계의 스타였습니다. 많은 남성들의 구애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철저하게 절제된 우아함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1년, <워싱턴 타임즈 헤럴드>의 사진기자로 일하던 그녀는 전도유망한 정치인 존 F. 케네디를 취재하며 인연을 맺습니다. 당시 케네디는 결혼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금발의 마릴린 먼로 타입의 여성만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재클린은 자신만의 매력으로 그를 사로잡았고, 1953년 두 사람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립니다.
결혼 후에도 그녀는 단지 정치인의 아내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1960년, 케네디가 대통령에 출마하며 전국적인 유세를 벌이던 시기에도 그녀는 유산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곁을 지켰고, 1961년 1월, 미국의 35대 대통령 부인이 되었습니다. 31세의 나이에 퍼스트레이디가 된 재클린은 단숨에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녀는 백악관을 단순한 정치 공간이 아닌 예술과 문화를 아우르는 고급스러운 공간으로 탈바꿈시켰고, 세계 각국의 귀빈들을 접대하며 미국의 품격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녀의 패션 감각도 전 세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샤넬 수트, 필박스 모자, 대형 선글라스, 장갑, 부풀린 헤어스타일 등은 모두 그녀가 자신의 외모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택한 ‘전략적 스타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세계적인 유행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스타일은 단지 외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았고, 이후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녀의 룩을 모방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녀는 단순한 영부인을 넘어 하나의 ‘브랜드’로 기능하며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됩니다.
3. 비극을 품은 두 번의 결혼, 그리고 전설이 된 마지막 장
1963년 11월, 미국 달라스에서 벌어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은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바로 옆에서 그 참극을 지켜본 재클린은 남편의 유해를 수습하며, 슬픔 속에서도 침착하게 장례식을 기획해 전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녀가 입었던 핑크색 샤넬 수트는 그날의 비극과 함께 미국 현대사의 상징이 되었고, ‘사랑과 충성심’의 대명사로 남게 됩니다. 34세의 나이에 미망인이 된 재클린은 이후 아이들과 함께 조용히 은둔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평온한 삶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68년, 남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역시 암살당하자 재클린은 ‘누군가 케네디 가문을 제거하고 있다’는 극심한 불안 속에서 결국 그해 10월,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을 결정합니다. 이 결혼은 전 세계의 충격과 비난을 불러왔지만, 재클린에게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자 아이들을 위한 ‘보험’이기도 했습니다. 이 결혼은 전통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있었고, 서로 다른 가치관은 끝내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오나시스가 이혼 소송을 제기하던 도중인 1975년, 그는 사망하며 재클린은 또 한 번 미망인이 됩니다.
하지만 재클린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한 후에는 출판업계에 뛰어들어 편집자로서 자신만의 경력을 쌓으며 제2의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그녀는 더블데이 출판사에서 수석 편집자로 활동하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진짜 ‘지식인 퍼스트레이디’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1994년, 림프종으로 투병 끝에 64세로 사망한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우아한 여성’으로 기억되었고, 그녀의 유품은 경매를 통해 3,400만 달러 이상을 기록하며 여전히 높은 영향력을 증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