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페론, 한때는 무명 여배우였지만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과의 만남으로 신데렐라 같은 인생 역전을 이뤘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동시에 포퓰리즘의 상징이 되었죠. 에비타의 삶과 그 끝은 아르헨티나의 명암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가난한 소녀에서 권력자의 곁으로: 에비타의 인생 역전
에바 페론은 1919년, 아르헨티나의 시골 마을에서 혼외자식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부남인 부유한 목장주였고, 에바는 어머니와 함께 정실부인의 가족에게 철저히 외면당한 채 자라야 했다.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로 성장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사회의 냉대와 차별을 경험하며, 세상의 불공정을 뼈저리게 느꼈다. 학업 성적은 평범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에바를 조기 결혼시켜 독립시키려 했지만, 에바에겐 꿈이 있었다. 배우가 되어 화려한 삶을 사는 것. 이를 위해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상경한 에바는 막연한 자신감을 품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학연도 없고 연기 경험도 없던 그녀는 영화계에서 무시당했고, 생계를 위해 결국 성적인 대가로 일자리를 얻는 선택을 하게 된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였고, 많은 여성들이 남성 권력자들에게 기대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에바는 라디오 방송, 소극장 출연 등으로 점차 입지를 다져 나간다. 그러던 중 열린 군인 자선 행사에서 후안 페론을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뀐다. 페론은 노동자 중심의 정치 노선을 걷고 있었고, 에바는 그에게 반하고, 곧 연인이 된다. 페론의 권력 상승과 함께 에바는 점차 정치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녀는 방송 진행자로서 페론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노동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으며, 마침내 대통령의 아내,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 된다.
가난한 자의 수호자 vs 특권층의 적, 두 얼굴의 에비타
에비타가 대통령의 아내가 되자 그녀는 단순한 퍼스트 레이디가 아닌,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해 고아들에게 옷과 식사를 제공하고, 병원과 학교를 세우며 직접적인 복지를 실현했다. 그녀의 재단은 2,800만 페소에 달하는 예산을 운용하며 정부 못지않은 영향력을 지녔다. 그녀는 40만 켤레의 신발, 20만 개의 냄비, 50만 대의 재봉틀을 나눠주는 등 실질적인 도움을 줬고,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급했다. 하지만 이런 복지의 자금은 노동조합과 기업들의 기부로 충당됐으며, 기부를 거부하는 기업엔 감사나 전기 차단 등 보복이 따랐다. 에비타는 부자들에 대한 증오를 드러냈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순수하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강조했다. 그녀는 상류층 여성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자선협회 가입조차 거절당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자신만의 재단을 만든 것이다. 에비타는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았다. 매독에 걸려 입이 뒤틀린 소녀를 안고, 싱글맘의 아기를 돌보는 등 따뜻한 면모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명품 드레스를 입고 보석을 즐기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고, 가족과 지인들을 고위직에 등용하는 등 은밀한 특혜도 자행되었다. 상류층에선 그녀를 조롱하고 배척했지만, 하층민들은 그녀를 성녀처럼 떠받들었다. 이런 극과 극의 시선 속에서 에비타는 점차 정치적 존재로 부상했고, 여성 참정권 도입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1947년, 아르헨티나 여성들도 투표권을 얻게 되었고, 후안 페론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포퓰리즘의 정점과 몰락, 에비타의 죽음과 아르헨티나의 교훈
에비타는 부통령 출마를 고려할 정도로 정치적 위상을 높였지만, 그녀의 건강은 이미 악화되어 있었다. 자궁경부암 말기 진단을 받은 그녀는 1952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윤후 궁전에서 사망한다. 그녀의 죽음은 전국적인 슬픔을 불러일으켰고, 그녀의 시신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한편, 그녀의 죽음은 페론 정권의 이미지 제고에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 페론 정권은 언론 통제, 반대파 탄압 등 독재적 성격을 강화했고, 결국 군부 쿠데타로 인해 실각한다. 에비타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졌고, 그녀의 이름, 동상, 사진까지도 금지되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그녀를 기억했고, 20년 후 페론은 다시 대통령으로 복귀한다. 그의 부인 이사벨은 에비타의 후계자로서 정치에 나섰지만, 페론 사망 이후 아르헨티나는 혼란에 빠진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에비타와 페론의 포퓰리즘이 아르헨티나 경제를 파탄시켰다고 평가한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세계 10위권의 부국이었지만, 산업 국유화와 과도한 복지정책은 민간 경제를 무력화시켰고, 외채와 인플레이션이 반복되며 국가 경쟁력을 잃었다. 특히 노동자와 생산자 모두가 국가에 의존하게 되면서 자생력이 사라졌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문제로 남았다. 최근엔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내건 하비에르 밀레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포퓰리즘 청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아르헨티나에는 페론주의를 신봉하는 세력이 존재하며, 에비타는 신화적 존재로 남아 있다. 에비타의 생애는 단지 한 여성의 삶이 아니라, 한 나라의 부흥과 몰락, 그리고 정치가 대중을 어떻게 사로잡고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