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후이자 섭정으로 절대 권력을 휘두른 여태후. 백수건달이던 유방의 부인에서 황후가 된 그녀는, 냉혹한 복수와 집념으로 한나라의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조명한다.
성장배경
기원전 241년경, 여치로 알려진 여태후는 중국 패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역 유지였고, 여치는 총명하고 당찬 성격으로 유명했다. 당시 이름난 백수건달이자 무뢰한이었던 유방과 혼인하게 되는데, 이는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는 계기가 된다. 여치의 아버지는 유방의 기개를 알아보고, 강제로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결혼 후 여치는 남편의 무책임함 때문에 옥살이까지 해야 했으며, 유방이 병사를 일으켜 전쟁에 나섰을 때 시아버지와 자식들을 보살피며 내조에 헌신했다. 그녀는 강한 기백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남편의 부상자가 되어, 훗날 황후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넓혀나갈 토대를 다졌다.
결혼 후 삶과 죽음
유방이 황제가 된 이후, 여태후는 단순한 황후 이상의 존재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유방이 개국공신들을 제거하려 할 때 여태후는 오히려 먼저 행동하여 정적들을 제거하거나 유방의 숙청을 도왔다. 이후 유방이 총애하던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를 태자로 삼으려 하자, 여태후는 아들 유영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정면으로 충돌했다. 유방 사후, 아들 해제가 황제가 되면서 여태후는 섭정으로 권력을 쥐게 되었고, 척부인을 향한 복수를 실행에 옮겼다. 그녀는 척부인을 분뇨 속 감옥에 가두고 팔다리를 절단한 뒤 눈을 뽑고 벙어리로 만들며 ‘인간 돼지’로 만든다. 심지어 해제에게 이를 보게 해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해제는 정치를 포기하고 방탕한 삶을 살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이후 여태후는 손자 소제를 황제로 세우고 섭정을 계속하며 여씨 일족을 조정 요직에 대거 등용했다. 황제를 세우고 폐하는 것조차 그녀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고, 한나라는 실질적으로 여씨 정권 아래 운영되었다. 여태후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단지 척부인만을 제거한 것이 아니었다. 유방이 총애하던 후궁들과 자식들까지 차례로 제거하거나 변방에 유배시키며 권력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그녀는 여씨 일족을 대거 조정에 등용하여 절대 권력을 형성했고, 황실보다 더 강한 존재로 군림했다. 여태후의 지배하에 한나라는 겉으로는 평화로웠지만, 조정 내에서는 살벌한 감시와 숙청이 끊이지 않았다. 정적을 제거하고 여씨 중심의 정치를 펴던 그녀는, 황제를 세우고 폐하는 일조차 자신의 뜻대로 조정했다. 손자 소제가 황제가 된 후에도,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되자 그를 폐위하고 다시 유홍을 옹립할 정도로, 황제조차 그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녀는 말 그대로 “황제를 만드는 자”였고, 이는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여태후 사후
기원전 180년, 여태후는 건강 악화로 인해 점차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고 결국 사망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억눌려 있던 조정 내부의 반발이 폭발하며 여씨 일족은 대대적인 숙청 대상이 되었고, 정권은 붕괴되었다. 황실은 본래 유 씨 가문 중심으로 복귀한다. 사마천은 여태후의 통치를 “백성은 편안했지만 정치는 잔혹했다”라고 평했다. 실제로 피비린내 나는 정쟁은 줄었고 백성은 생업에 집중할 수 있었으나, 황제를 좌지우지하고 정적을 고문하거나 제거하는 그녀의 정치 방식은 공포 그 자체였다. 역사적 평가는 극단적이다. 절대 권력을 쥔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은 높게 평가받지만, 척부인에게 가한 복수와 폭정은 여태후를 ‘중국 3대 악녀’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도 논쟁적인 여성 통치자 중 한 명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