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가 낳은 전설적인 여배우 소피아 로렌은 고난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연기력, 인간미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인물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도 배우라는 꿈을 꿨고, 이를 현실로 만들어낸 그녀의 삶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았습니다. 영화계 거물 카를로 폰티와의 운명적인 만남, 캐리 그랜트와의 러브스토리, 그리고 탈세로 인한 감옥생활까지. 진정한 여신의 삶을 따라가 봅니다.
1. 가난과 차별 속에 태어난 소녀, 여신이 되다
소피아 로렌은 1934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처음부터 온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귀족 출신의 한량으로, 그녀의 어머니를 임신시키고는 떠나버렸습니다. 그 결과 소피아는 사생아로 태어나야 했고, 산파조차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아기"라 말했을 정도였죠. 그녀의 어머니는 여배우 지망생이었으나, 사랑의 배신으로 평생을 두 딸과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헌신적인 어머니의 희생은 소피아의 인생에 뿌리 깊게 새겨졌고, 평생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어린 시절은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외가댁 식구들과 함께 나폴리에서 자란 그녀는 피아노와 노래로 생계를 꾸리던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랐고, 그 속에서 본능적으로 예술적 감각을 익혔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 배우의 꿈은 쉽게 꾸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별명은 '이쑤시개'였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이 희미한 소녀였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변화가 찾아온 것은 14세 무렵, 하룻밤 사이에 말라깽이 소녀가 아름답고 육감적인 여성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이후 그녀는 거리에서조차 남성들의 시선을 끌며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고, 운명은 마침내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콜로세움 근처 식당에서 중년 남성이 건넨 쪽지는 미인대회 참가 권유였고, 궁핍한 형편 속에서도 커튼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참가한 그녀는 당당히 2위를 차지합니다. 그 남성은 바로 훗날 그녀의 운명을 바꾼 영화 제작자 카를로 폰티였습니다. 그는 이후 그녀의 후견인이자 인생의 파트너가 되어, 소피아 로렌의 전설을 함께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2. 영화계의 뮤즈, 카를로 폰티와의 격정 로맨스
소피아 로렌이 연기의 세계에 첫 발을 디딘 건 1951년 영화 <쿠오바디스>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녀는 배우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었고, 카를로 폰티는 그런 그녀의 재능을 간파했습니다. 소피아는 처음엔 경계했지만, 점차 보호자처럼 느껴지는 그의 존재에 마음을 열게 되었죠. 무엇보다도 마피아가 점령했던 당시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카를로 같은 거물은 그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곧 사랑으로 발전했고, 소피아는 자연스럽게 그의 연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후 1953년 영화 <아이다>에서 주연을 맡으며 이탈리아 영화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고, <나폴리에 황금> 등을 통해 헐리우드에서도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하지만 폰티는 여전히 유부남이었고, 이혼이 금지된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서 이들의 관계는 가십거리로 소비됐습니다. 특히 22세의 나이 차이까지 더해져 세간의 비난은 더욱 거셌죠. 소피아는 헐리우드에서도 주목받는 배우가 되었지만, 그곳에서도 또 다른 로맨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대배우 캐리 그랜트였습니다. 함께 작업하며 그는 그녀에게 열렬한 구애를 펼쳤고, 그녀도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결국 폰티를 선택합니다. 소피아는 “캐리 그랜트와 함께 미국에 갔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진심이 통했던 카를로 폰티를 남편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법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멕시코에서 변호사를 통해 법적인 결혼을 시도했으나 1962년 무효가 되었고, 결국 프랑스로 건너가 시민권을 취득한 뒤, 전처의 동의를 받아 정식으로 결혼하게 됩니다. 그들의 사랑은 수많은 장애를 넘어서 결국 이루어진 진정한 로맨스였습니다.
3. 감옥에서도 우아했던 그녀, 여신의 품격
이탈리아와의 인연은 끝내 그녀에게 가혹했습니다. 1977년, 남편 카를로 폰티는 불법적인 금융 거래로 기소되며 재산을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됩니다. 이어 1980년에는 소피아 로렌이 1960년대에 저지른 약 3억 원의 탈세 혐의가 드러나며 문제가 됩니다. 회계사의 실수라고 주장했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봐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시민이었던 그녀는 법적으로 처벌을 피할 수 있었지만,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어머니를 보지 못할까 봐 자진해서 이탈리아로 돌아옵니다. 그녀는 17일간의 짧은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기간 동안 수많은 팬들이 그녀의 창문 아래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응원을 보냈습니다. 감옥에서도 여신의 품격을 잃지 않았던 그녀는, 사치스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참을성과 성숙함으로 팬들의 사랑을 더욱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후에도 평생 카를로 폰티와 함께했고, 두 아들을 낳아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물론 폰티가 바람을 피우며 그녀를 힘들게 한 적도 있었지만, 소피아는 그를 끝까지 지켰고 “카를로는 최고의 남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헐리우드에서 수많은 남자 배우들에게 구애를 받았고, 캐리 그랜트, 그레고리 펙 등과 썸도 있었지만 결코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녀에게 사랑은 연민과 보호 본능, 그리고 신뢰였고, 그것을 끝까지 지켜냈던 그녀는 진정한 의미의 우아함을 보여준 여성이었습니다. 카를로 폰티가 2007년 94세로 사망한 후, 소피아 로렌은 가족과 함께 스위스에서 조용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연기력, 인격까지 겸비한 그녀의 삶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