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출신의 전설적인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은 외모와 연기력을 겸비한 배우로, 헐리우드 황금기의 아이콘이었다. 추락과 논란 속에서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그녀는 끝까지 카메라 앞에 선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녀의 삶을 되돌아본다.
성장배경
잉그리드 버그만은 1915년 8월 2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열세 살에는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된 그녀는 친척 집에서 자라며 외로움을 상상력으로 이겨냈다. 사진작가였던 아버지는 종종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었고, 이 경험은 그녀가 자연스럽게 카메라 앞에 서는 법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스웨덴 최고의 연기 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며 연기 인생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우연한 기회에 영화에 출연하게 된 그녀는 그 재능을 인정받아 빠르게 주연급으로 성장했고, 유럽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러던 중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이 그녀를 발탁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스웨덴 영화 <인터메조>의 리메이크작에서 주연을 맡으며 할리우드에 진출한 그녀는, 단아한 외모와 귀족적인 분위기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후 <카사블랑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을 통해 세계적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결혼 후 삶과 죽음
잉그리드 버그만은 연기뿐 아니라 삶에서도 격정적인 여정을 걸었다. 첫 번째 남편 페터 린드스트롬과의 사이에서 딸을 얻었지만, 진정한 사랑을 찾아 떠난 그녀의 삶은 헐리우드 역사상 가장 큰 스캔들 중 하나로 이어졌다. 이탈리아의 거장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영화를 보고 감동한 그녀는 직접 편지를 보내 출연 의사를 밝히고, 이후 로셀리니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문제는 두 사람 모두 기혼자였다는 점이었다. 이 불륜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헐리우드는 그녀를 철저히 배척했다. 출연작 <잔 다르크>는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었고, 그녀를 기용하려는 스튜디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버그만은 로셀리니와 결혼해 세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어머니를 닮아 배우로 성장했다. 로셀리니와의 영화들은 흥행에 실패했지만, 이후 모더니즘 영화로 재조명되며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잇따른 실패와 경제적 문제로 결국 그녀는 헐리우드 복귀를 결심하게 되고, 1956년 영화 <아나스타샤>로 성공적인 복귀를 이뤄내며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이후 로셀리니와는 1957년 이혼하고, 스웨덴 연극 연출가 라르스 슈미트와 세 번째 결혼을 하며 프랑스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영화보다는 연극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세계 순회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가족에게는 헌신적인 어머니였고, 연기에는 평생을 바쳤던 그녀는 1971년 유방암 선고를 받았지만, 끝까지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 1982년,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이며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자신의 67번째 생일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사후
잉그리드 버그만은 자신의 생일이자 마지막 날인 1982년 8월 29일, 프랑스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고향 스톡홀름에 묻히며, 묘비에는 “거침없이 사랑했고, 연기 없이 살 수 없었던 사람”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녀는 한때 불륜과 논란으로 비난받았지만, 연기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헌신은 시간이 지나며 더욱 빛을 발했다. 사후 그녀의 연기와 삶은 재조명되었고, 수많은 후배 배우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로 남게 되었다. 특히 여성 배우로서 자기 결정권을 지키며 자신의 삶을 선택해간 그녀의 태도는 시대를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녀가 남긴 명작들은 지금도 전 세계 영화팬들에게 회자되며, <카사블랑카>에서의 모습은 할리우드 역사에 길이 남을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배우이자 감독, 모델로 활동하며 어머니의 유산을 잇고 있으며, 잉그리드 버그만의 삶과 작품은 다큐멘터리와 전시, 회고전을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조명받고 있다. 연기를 위해 태어나고, 연기를 위해 살다 간 그녀는 지금도 ‘영원한 여배우’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