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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프랑스의 성녀에서 마녀로

by 파워뷰티 2025.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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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는 100년 전쟁 당시 프랑스를 구한 영웅으로 찬양받았지만, 적들에게 붙잡혀 마녀로 몰려 화형 당했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믿음으로 왕세자를 도왔고, 오를레앙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왕은 그녀를 버렸고, 적들은 그녀를 악마의 추종자로 낙인찍었다. 사후에도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그녀의 안타까운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잔다르크

출생과 성장배경

잔다르크는 1412년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 동레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농부였고, 그녀 역시 농사일을 도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거나 쓸 줄 몰랐지만, 신앙심이 깊어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1424년, 12살이 된 잔다르크는 신비한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목소리가 신의 계시라고 믿었고, 프랑스 왕세자 샤를 7세를 도와야 한다는 사명을 느꼈다. 당시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파의 연합군에게 밀리고 있었고, 수도 파리까지 위협받고 있었다. 오를레앙은 프랑스 남부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만약 함락된다면 프랑스의 패배가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잔다르크는 신의 계시를 전하기 위해 지역 수비대를 찾아갔지만, 미친 소녀 취급을 받으며 쫓겨났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가 자신의 말을 전했고, 결국 그녀의 강한 신념에 감동한 수비대장이 왕세자에게 그녀를 보낼 기회를 주었다. 왕세자 샤를 7세는 처음에는 그녀를 믿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신의 뜻을 받들었다는 증거를 원했다. 이에 잔다르크는 왕세자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 변장하고 있어도 그를 정확히 알아보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이에 왕세자는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 법학자들과 성직자들에게 검증을 맡겼고, 잔다르크는 이 과정을 통과했다. 결국, 그녀는 왕세자의 신임을 얻고 오를레앙 전투에 투입되었다. 전투에 참여한 경험도, 무기를 다룬 경험도 없는 17세 소녀가 전장에 나서게 된 것이다.

결혼 후 삶과 죽음

잔다르크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오직 프랑스를 구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429년 오를레앙 전투에서였다. 오를레앙은 잉글랜드 군에게 포위당한 지 200일이 넘었고, 프랑스군은 지쳐가고 있었다. 잔다르크는 깃발을 들고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전투를 이끌었다. 그녀가 도착한 지 불과 9일 만에 오를레앙 포위 전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는 프랑스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잔다르크는 ‘오를레앙의 성녀’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는 왕세자를 데리고 랭스로 향했다. 랭스는 프랑스 왕들의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로, 여기서 왕위에 오르면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적군이 장악한 도시를 지나면서도 성문을 열게 만들었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랭스에 입성했다.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는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잔다르크는 왕의 곁에서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성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관식을 마친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 전쟁을 지속할 의지가 없었고, 평화 협상을 원했다. 반면 잔다르크는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왕은 그녀를 외면했다. 1430년 5월, 그녀는 부르고뉴 파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 부르고뉴 파는 그녀를 잉글랜드에 넘겼고, 잉글랜드는 그녀를 마녀로 몰아 종교 재판에 회부했다. 재판은 5개월간 진행되었고, 그녀는 29번의 신문을 당했다. 그녀가 남장을 했다는 이유로 신의 섭리를 어겼다는 죄목이 추가되었으며,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주장이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논리로 공격받았다. 1431년 5월 30일, 잔다르크는 화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루앙의 광장에서 공개 처형되었으며, 잉글랜드는 그녀의 시신이 성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 번이나 불태운 후 재를 강에 뿌렸다.

국민들의 반응

잔다르크의 죽음은 프랑스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녀를 성녀로 여겼던 국민들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왕실과 귀족들은 침묵했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1453년, 프랑스는 100년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었고, 잉글랜드는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이후 샤를 7세는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잔다르크의 재판을 무효화했다. 1456년, 프랑스는 잔다르크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공식 판결을 내렸고, 그녀의 명예를 회복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정치적인 목적이 컸다. 그녀가 이단으로 처형되었다면, 그녀가 왕을 세운 행위도 정당성을 잃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잔다르크는 여러 시대에 걸쳐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그녀를 국가의 영웅으로 선전하며 군사적 사기를 높이는 데 활용했다. 또한 1920년, 가톨릭 교회는 그녀를 성인으로 시성하며 종교적으로도 그녀의 역할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녀는 죽기 전까지 버림받은 존재였다. 프랑스를 위해 싸웠지만, 왕은 그녀를 구하지 않았고, 성직자들은 그녀를 이단으로 몰았다. 오직 그녀를 신앙의 상징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다시 끌어올렸을 뿐이다. 잔다르크의 삶은 영광과 배신이 공존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그녀는 프랑스를 구했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흔적은 여전히 프랑스 역사 속에 살아 있으며, 그녀의 이름은 용기와 희생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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