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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여배우, 에바 가드너

by 파워뷰티 2025.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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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황금기를 수놓은 전설적인 여배우, 에바 가드너.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그녀의 인생은 자유와 욕망, 사랑과 상처로 점철된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술과 담배, 그리고 남성에 탐닉했던 그녀의 삶을 되짚으며,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묻고 싶어집니다.

에바 가드너

🌹 헐리우드가 사랑한 여신, 에바 가드너의 탄생

1922년 크리스마스 이브,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가난한 담배 소작인 가정에서 태어난 에바 가드너는 총 7형제 중 막내였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강인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녀는 뉴욕을 방문한 어느 날, 형부가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이 사진은 MGM의 눈에 띄었고, 에바는 노래도, 연기도, 심지어 말투도 엉망이었지만 “뭔가 굉장하다”는 이유로 7년짜리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녀의 남부 억양은 문제가 되었지만, 그조차도 그녀를 막지 못했습니다. MGM과 계약한 에바는 이름도 오르지 않는 B급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연기 수업과 발성 훈련을 병행했고, 결국 MGM의 스타 미키 루니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들과의 짧은 결혼은 미키 루니의 끊임없는 바람기와 언론의 공격으로 17개월 만에 끝났지만, 이는 에바가 대중의 관심 속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계기였습니다.

진정한 전환점은 1946년 영화 킬러스에서 버트 랭카스터와 호흡을 맞춘 때였습니다. 이 작품으로 에바는 처음으로 ‘배우’로 인정받게 되었고, 그녀의 관능적인 매력이 대중과 평단을 사로잡기 시작했죠. 이후 재즈 아티스트 아티 쇼와 재혼했지만, 이 결혼 또한 1년 만에 끝났습니다. 그녀는 곧바로 하워드 휴즈의 구애를 받았지만 단호히 거절했고, 유부남이던 프랭크 시나트라를 택하며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이 모든 선택은 대중의 도마 위에 오르며 스캔들로 번졌지만, 에바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본능과 욕망에 충실했던 그녀의 삶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으나, 동시에 한 여성의 주체적인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 사랑과 자유의 대가, 프랭크 시나트라와의 격정적 결혼

프랭크 시나트라와의 관계는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격정적인 러브스토리 중 하나였습니다. 에바는 당시 유부남이었던 프랭크에게 빠져들었고, 두 사람은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1951년 결혼하게 됩니다. 프랭크는 파산 상태였고, 에바는 그의 전처 아이들의 선물비용까지 부담해야 할 정도로 헌신했습니다. 다행히 프랭크는 1953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재기에 성공했지만, 결혼 생활은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에바는 영화 모감보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커리어 정점에 있었지만, 프랭크와의 사생활은 온갖 잡지와 신문을 장식하며 피로감을 안겼습니다. 두 번의 낙태는 프랭크와 상의도 없이 이뤄졌으며, 그녀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로 “그의 사생활은 아이를 키우기에 적절치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녀가 사망 후 출간된 자서전에서는 MGM이 자사 배우들의 임신을 금지하거나 벌칙 조항을 걸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죠.

1957년, 두 사람은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질투심과 소유욕, 에바의 자유로운 연애 성향이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외도는 신문을 도배했지만, 프랭크 또한 유명한 바람둥이였기에 이는 역설적으로 더욱 격렬한 충돌을 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서, 예술과 욕망, 독립과 억압의 투쟁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스페인, 런던, 그리고 쓸쓸한 말년

이혼 이후 에바 가드너는 점차 연기보다는 방탕한 생활로 주목을 받게 됩니다. MGM과의 계약이 끝난 후 그녀는 할리우드를 떠나 스페인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술, 담배, 그리고 남성들과의 관계에 더욱 탐닉하게 됩니다. 하루에 윈스턴 세 갑을 피우고 밤새도록 파티를 벌이는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영화 속 ‘백작 부인’이 아닌 현실의 ‘파괴된 여신’이었습니다.

10년 후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노화된 외모와 자궁암 수술 이후의 후유증은 그녀를 더욱 위축시켰습니다. 절친 나나 터너보다 주름이 많다는 사실은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결국 그녀는 한동안 집 밖으로 나서지 않은 채 은둔하게 됩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갈망은 여전했고, 말년에는 몇 편의 TV 작품에 출연하며 마지막 불꽃을 피웠습니다. 1986년에는 루푸스와 뇌졸중으로 인해 반신불수가 되었고, 결국 1990년 1월 25일, 런던의 병원에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죽은 뒤 병원비와 장례비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모두 부담했으며, 그녀의 충직한 가정부와 반려견은 친구 그레고리 팩이 맡아 돌봤습니다. 이는 비극적인 삶을 마친 여배우를 위한 가장 인간적인 배려이자, 할리우드가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애도였습니다. 에바 가드너는 생전 ‘가장 아름다운 동물’이라 불렸지만, 실은 가장 인간적인 상처를 안고 살았던 여성입니다. 그녀의 삶은 찬란했지만 동시에 슬펐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의 욕망과 자유를 좇았던 여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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