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느 모로는 1960년대 프랑스를 대표한 전설적인 여배우이자 누벨 바그의 아이콘입니다. 겉치레 없는 민낯으로 유럽 영화계에 파격을 던진 그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대였습니다. 연기, 스타일, 인생 모두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그녀의 삶을 돌아봅니다.

1. 민낯으로 전설이 되다: 누벨 바그의 여신, 잔느 모로
잔느 모로는 1960년대 유럽 영화계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여배우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뚜렷한 이목구비 대신, 거칠고 자연스러운 얼굴로도 화면을 장악할 수 있다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낸 배우였습니다. 부은 눈두덩과 큰 눈, 처진 입꼬리, 그리고 피로가 묻어나는 깊은 다크서클까지. 이는 당시 여배우들에게 요구되던 ‘완벽한 미모’의 기준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습이었지만, 잔느 모로는 바로 그 자연스러움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특유의 시크한 분위기와 지성, 그리고 적당한 무심함으로 당시 세계 영화계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쌩얼의 미학’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잔느 모로의 대표작 중 하나인 1958년작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는 그녀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그 이후 그녀는 1961년의 영화 **《연인들》**로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마성의 여우’라는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기준으로도 파격적인 성적 묘사와 연출로 유럽 전역에 충격을 주었고, 그녀의 명성을 확고히 굳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명작 《쥘과 짐》**에서 그녀가 보여준 자유롭고 감각적인 여성상은 이후 누벨 바그 영화의 여성 캐릭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는 시대를 앞서간 존재였습니다. 전통적인 미녀상에서 벗어난 잔느 모로는 카트린 드뇌브, 브리지트 바르도와 함께 1960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3대 여배우로 꼽히지만, 감독들이 가장 함께 작업하고 싶어 한 인물은 바로 잔느 모로였다고 평가됩니다. 화려함보다는 깊이, 겉치레보다는 본질을 추구한 그녀의 연기는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2. 전쟁의 그늘에서 예술로: 그녀의 삶과 배우로의 여정
잔느 모로는 1928년 1월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술집 주인이었던 프랑스인 아버지와 영국인 무용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유년 시절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은 남프랑스로 이주하여 식당과 작은 호텔을 운영하며 생활했지만, 부모는 행복한 결혼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버지는 술에 의지했고, 어머니는 영국인이라는 이유로 가족 내에서 배척당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가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전쟁은 가족을 더욱 분열시켰습니다. 잔느 모로는 전쟁통 속에서 게슈타포의 감시를 피해 살아야 했고, 거리에는 군인들이 늘어선 위안소 위로 급하게 뛰어 들어가야 했던 일상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녀가 연기에 눈뜬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책을 통해 삶의 고통에서 도피하던 어린 잔느는 15세에 라틴어 수업을 빼먹고 본 연극 『안티고네』를 보고 인생의 방향을 정합니다. 이윽고 파리 콘서바토리에서 연기를 배우고, 프랑스 국립극단 ‘코미디 프랑세즈’의 단원이 되며 본격적인 배우의 길에 들어섭니다. 아버지는 이러한 그녀의 선택을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었고, 잔느는 아버지의 반대를 이겨내며 스스로 입지를 다져나갑니다.
1949년 배우 장 루이 리샤르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으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곧바로 무대에 복귀한 그녀는 일과 사랑 모두에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그녀는 장 마르 감독과 함께 작업하며 누벨 바그 영화의 중심으로 떠오릅니다. 감독은 그녀의 독특한 얼굴과 자연스러운 연기를 극대화하여 카메라에 담았고, 이는 프랑스 영화의 미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3. 자신만의 철학으로 살아간 프랑스의 반항적 아이콘
잔느 모로는 단지 배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삶 자체가 하나의 철학이자 정치적인 선언이었던 인물입니다. 그녀는 ‘자연스러운 외모가 아름다움’임을 주장했고, 육체적 매력을 내세우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깊이를 보여주는 연기를 선호했습니다. 페미니스트로도 활약하며, 육체적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사회적 시선에 반기를 들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육체의 아름다움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당시 여성 배우들이 겪어야 했던 외모 중심의 평가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프랑수아 트뤼포, 루이스 부뉴엘, 오슨 웰스 등 당대 최고의 감독들과 함께 작업하며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녀는 사생활에서도 당당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수차례의 결혼과 이혼을 겪었고, 예술적 동료들과의 연애와 교류는 잦았지만,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녀는 인생을 "산을 오르고, 다시 내려오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거창한 의미 부여보다는 묵묵한 자기 성찰이 그녀의 인생관이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에도 영화계와 사회활동에 꾸준히 참여했던 잔느 모로는, 2017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두고 당시 마크롱 대통령은 “그녀는 영화 그 자체였으며, 늘 확립된 질서에 저항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 애도를 표했습니다. 이 말은 잔느 모로의 삶을 가장 정확히 정의하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녀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지성적이며 예술적인 여성상이었고, 오늘날에도 그녀의 영화들은 패션, 영화, 문화계에서 여전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잔느 모로는 단지 한 시대의 아이콘이 아니라, 어떤 시대에도 통할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