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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올덤 켈시(기형아 유발 막아낸 과학계 영웅)

by 파워뷰티 2025.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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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탈리도마이드 참사. 그러나 미국만은 예외였다. 그 중심엔 철저한 원칙주의자 프랜시스 올덤 켈시가 있었다. 수만 명의 기형아 탄생을 막아낸 그녀의 결단은 과학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저지 중 하나로 기억된다.

프랜시스 올덤 켈시

성장 배경

프랜시스 올덤 켈시는 1914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몬트리올의 맥길대학교에서 약학을 공부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미국 시카고 대학교로 진학해 약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여성 과학자에 대한 편견이 만연하던 시기였지만, 켈시는 학문적 열정과 철저한 논리로 실력을 인정받으며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갔다. 박사 과정 중에는 신약의 안전성과 독성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고, 이 경험은 훗날 탈리도마이드 심사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던 그녀는 1960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 FDA는 제약사의 제출 서류를 대체로 형식적으로 검토하던 분위기였으나, 켈시는 첫 배정 업무였던 탈리도마이드 심사에서부터 남다른 자세를 보인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시판 중이었고, 별다른 문제 제기 없이 통과되고 있던 약물이었지만, 켈시는 데이터의 부실함과 태아에 대한 안전성 검토 부족을 이유로 승인을 거부한다. 그녀의 의심과 집요함은 곧 전 세계를 뒤흔들게 될 참사의 실체를 밝혀내는 단초가 된다.

결혼 후 삶과 죽음

프랜시스 켈시는 결혼 후에도 학문과 연구를 이어갔다. 남편 프레드 켈시 또한 약리학자였기에 두 사람은 학문적 파트너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연구와 실험을 함께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60년, 켈시는 FDA에 심사관으로 합류하게 된다. 그녀가 처음 맡은 업무는 ‘탈리도마이드’라는 신약의 미국 내 판매 허가 여부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이미 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판매 중이던 약물은 입덧 완화제로 각광받고 있었고, 미국 내 제약사는 제품을 대량으로 준비한 상태였다. 허가는 단순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는 분위기 속에서도, 켈시는 임상 자료의 부족과 태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험 부재를 지적하며 허가를 거부했다. 제약사의 로비와 상부의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원칙을 고수한 그녀는 1년 동안 무려 여섯 차례나 탈리도마이드 승인을 반려했다. 결국 1961년, 유럽에서 탈리도마이드가 선천성 기형을 유발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켈시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팔과 다리가 없이 태어나는 ‘포코멜리아’ 증후군은 전 세계에서 12,000명 이상의 신생아에게 나타났고, 이 중 절반은 생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하지만 미국은 그녀 덕분에 단 17건의 피해만 보고 끝날 수 있었다. 이러한 공로로 그녀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시민상을 수상하게 되며, 미국 전역의 과학자들에게 ‘원칙과 신념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에도 켈시는 FDA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의약품 안전성과 생명윤리에 관한 정책 수립에 크게 기여했고, 2000년에는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다. 2005년, 무려 90세의 나이로 은퇴하기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대중의 시선이나 정치적 압력에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녀는 “과학은 타협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신념을 끝까지 지켜낸 사람이었다.

그녀 사후

프랜시스 올덤 켈시는 2015년, 10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죽음은 단지 한 과학자의 타계가 아니라, 인류의 생명을 지킨 위대한 이의 퇴장이었다. 켈시의 업적은 단순히 하나의 약품 승인을 막은 것을 넘어, 의약품 승인 과정의 엄격한 기준과 생명에 대한 존중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녀가 탈리도마이드의 허가를 막지 않았다면, 미국도 수천 명의 기형아 탄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겪었을 것이다. 그녀는 강단과 논리, 그리고 흔들림 없는 원칙으로 과학이 지녀야 할 책임감을 세상에 증명했다. 그녀의 업적은 여전히 미국 FDA의 신약 심사 기준에 반영되고 있으며, 과학계와 의료계에서도 그녀의 사례는 윤리 교육의 교과서처럼 활용되고 있다. 특히 그녀의 이야기는 여성 과학자들이 사회적 편견 속에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희망이 되었고, 수많은 이들에게 정의로운 선택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 알려주는 살아있는 사례로 남아 있다. 생전 조용하고 단호한 말투로 “나는 내 일이 옳다고 믿었을 뿐입니다”라고 했던 그녀의 말은, 과학의 힘이 단 한 사람의 용기로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까지도 그녀는 ‘과학계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전 세계의 아이들과 가족들이 그녀에게 끝없는 감사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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