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크 게이블은 단순한 영화 배우가 아니라, 한 시대를 대표한 헐리우드의 제왕이자 로맨스와 남성미의 상징이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고, 스캔들과 열애, 전쟁 참전까지 험난한 인생을 살아낸 그는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깊이 있는 배우였습니다. 사랑, 성공, 전쟁, 죽음을 모두 경험한 그의 삶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감동적이었고, 여전히 수많은 팬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습니다.

1. 유인원 같던 청년, 헐리우드의 제왕으로
클라크 게이블은 1901년 미국 오하이오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갓난아기일 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음악가 출신의 여성과 재혼하면서 소년은 예술과 청결, 그리고 절제된 삶을 배워갔습니다. 하지만 소년의 외모는 지금의 ‘제왕’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귀는 크고, 치아는 벌어졌으며, 털이 많고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185cm의 키와 당당한 체격만이 장점이었을 뿐, 배우로서의 가능성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바꾼 사람은 바로 14살 연상의 극장 매니저 조세핀 딜러였습니다. 그녀는 클라크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상품’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외모 개선부터 발음 교정, 매너 교육까지 전방위적으로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도자기 치아와 보조개, 부리부리한 눈매가 그의 시그니처로 자리 잡았고, 마침내 할리우드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초기에는 큰 귀 때문에 관계자들의 걱정이 컸지만, 그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로 이미지 반전을 일으켰고, 오히려 청결하고 깔끔한 이미지로 여심을 사로잡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조세핀과 결혼했지만 곧 더 큰 기회를 위해 17살 연상의 상류층 여성 마리아 랭엄과 재혼합니다. 돈과 커넥션을 바탕으로 헐리우드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그는 최고의 여배우 조앤 크로포드와의 스캔들로 더욱 유명세를 탔습니다. 특히 청결 강박이 있었던 조앤과 깔끔한 클라크는 서로에게 완벽한 파트너처럼 보였지만, 둘은 사랑에 빠질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이별하게 됩니다. 클라크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스타로 떠오르며, 최고의 바람둥이이자 섹시한 남성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합니다.
2.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리고 운명적 사랑
1930년대, 클라크 게이블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성 배우로 떠오릅니다. 잘생긴 외모와 마초적인 매력, 그리고 터프하면서도 섬세한 감성은 여성 관객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여배우와 열애설에 휘말렸고, 로레타 영과의 스캔들로 인해 혼외 딸까지 생기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생애 가장 사랑한 여인 캐롤 롬바드를 만납니다. 당시 그는 여전히 마리아 랭엄과 결혼 중이었지만, 캐롤을 위해 막대한 위자료를 지불하고 결혼을 성사시킵니다. 캐롤은 그에게 안정과 평온,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안겨준 존재였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이 시기에 탄생한 명작으로, 클라크가 주저했던 이 작품을 선택하게 만든 것도 바로 캐롤이었습니다. 그녀는 시나리오가 아닌 원작 소설을 건네며 레트 버틀러라는 인물의 진짜 매력을 알려주었고, 클라크는 곧 캐릭터에 매료되어 출연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고,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라는 명대사와 함께 클라크 게이블은 ‘헐리우드의 제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그와 캐롤은 한적한 목장에서 소박하고 조용한 삶을 꿈꾸었고, 자녀 계획도 세우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중 비극은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1942년, 캐롤은 전쟁 채권을 홍보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라스베이거스 인근에서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클라크는 추락 현장을 직접 찾았고, 아내의 스카프 조각을 품에 안고 오열하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그를 완전히 무너뜨렸고, 그는 곧바로 군에 자원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합니다. 전투에 직접 참여하며 국가에 헌신한 그는 배우로서의 명예를 넘어 진정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3. 명예로운 퇴장, 진짜 ‘왕’으로 기억되다
클라크 게이블의 군 복무는 그저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5번의 전투에 참전했고, 평소 청결에 집착했던 성격 탓에 샤워기를 따로 설치할 정도로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결벽증 수준의 위생 습관 때문에 상대 배우들이 키스를 꺼렸다는 농담도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신사적인 태도로 동료들에게 존경받는 배우였습니다. 군 복무 후 다시 영화계로 복귀한 그는 <어드벤처>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 출연했지만, 예전만큼의 흥행을 기대하긴 어려웠습니다. 캐롤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과 나이로 인한 체력 저하가 겹치며 전성기 시절의 빛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꾸준히 연기를 이어갔고, 다양한 여성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캐롤이 떠난 지 7년 후, 영국 출신 배우 실비아 애슐리와 결혼하지만, 그녀의 사치와 방탕한 생활은 클라크와 맞지 않았고 결국 3년 만에 이혼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마지막 아내 케이 윌리엄스와 결혼해 안정을 되찾았지만,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 결국 1960년, 동맥 혈전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죽기 직전 유복자 아들을 갖게 되었고, 생전 그렇게 원했던 자신의 자녀를 결국 보지 못하고 눈을 감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전국적으로 보도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운이 좋았던 사람’이라고 적혀 있으며,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캐롤 롬바드의 묘지 옆에 그녀의 스카프 조각을 품에 안고 묻혔습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단순한 미남 스타가 아닌, 자신만의 철학과 삶의 태도를 끝까지 지켜낸 배우였습니다.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인간적인 슬픔, 그리고 국가를 위한 헌신까지 모두 담아낸, 진정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