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의 아이콘 앤디 워홀. 대중문화의 예술적 승화를 이끈 그는 누구보다 자유로웠지만 동시에 깊은 자기혐오와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문란한 성생활, 페르소나와의 충돌, 총격 사건까지… 전설이 된 남자의 충격적이고도 안타까운 삶을 되짚어봅니다.
🌈 예술과 정체성 사이: 워홀의 사랑, 집착, 그리고 자기혐오
앤디 워홀은 자신을 ‘동정남’이라 말했지만, 실상은 발 페티시, 관음증, 다수의 동성 연인과의 관계로 점철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성은 예술이자 실존의 영역이었고, 사랑은 소유가 아닌 지배 혹은 도피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그의 첫사랑 존 지오르노와의 관계에서 그 단초가 드러납니다. 워홀은 존이 자는 모습을 5시간 넘게 바라보다가 이를 영화 <잠(Sleep)>으로 제작했고, 존의 발을 핥는 장면이 일기 속에 묘사될 만큼 노골적인 성적 집착도 존재했습니다. 신발 디자인 공장에서 일하며 시작된 그의 ‘발’에 대한 강박은 작품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해 반복과 개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중예술을 완성해갔습니다.
그의 욕망은 이디 세즈윅과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상류층 출신의 이디는 워홀이 갖지 못한 ‘고급스러움’의 상징이었고, 그는 그녀를 따라 하듯 은색 머리를 하고 뮤즈로 삼았습니다. 이디는 겉보기엔 화려했지만, 아버지의 학대와 가족사로 인해 정신적 불안이 심각했고, 결국 약물중독으로 요절했습니다. 워홀은 이디를 통해 ‘사회적 자아’를 보완하려 했지만, 끝내 그녀의 비극에 책임감을 느끼며 더 깊은 혼란에 빠져듭니다. 그의 예술은 늘 타인의 정체성에 기생해 만들어졌고, 그런 모순은 끝없는 자기혐오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여성스러웠고, 외모에 극심한 콤플렉스를 가졌으며, 코 성형까지 시도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혐오했기에 다른 이의 정체성을 차용했고, 그런 심리가 그의 작업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입니다. 고전적인 예술가가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었다면, 워홀은 반대로 세상과 타인을 통해 자신을 찾으려 했던 셈이죠.
🔫 총격과 광기: 워홀을 겨눈 페미니스트의 분노
1968년, 앤디 워홀은 정신이상적 페미니스트 발레리 솔라나스에게 총격을 당합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친부와 조부로부터 반복적인 성폭행을 당했고, 남성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녀는 성폭력 피해자이자, 극단적 페미니즘을 신봉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시나리오 <Up Your Ass>를 워홀에게 건넸지만, 워홀이 이를 무시하고 원고를 분실하자 증오심을 품습니다. 발레리는 앤디를 '자신의 삶을 통제한 자'로 규정했고, 결국 그의 스튜디오 팩토리에서 총을 쏘게 됩니다.
워홀은 장기와 간, 비장에 심각한 손상을 입고 5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겨우 살아났습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심각한 편집증에 시달렸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점점 더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발레리는 체포 후 "나는 아무나 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정신분열증 판정을 받고 병원에 수감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 사회에 충격을 안겼고,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다양한 평가가 나왔습니다. 일부는 그녀를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저항의 아이콘’으로 보았고, 일부는 ‘미치광이’로 규정했습니다. 워홀의 경우, 사건 이후 예술적 열정이 한풀 꺾였고,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총격은 그에게 단순한 물리적 고통을 넘어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마저 흔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는 이후에도 팩토리 활동을 이어가긴 했지만, 과거의 ‘광기’는 서서히 희미해져갔습니다.
🕊️ 떠난 사랑들과 남겨진 공허함: 제드, 존, 그리고 앤디의 마지막
워홀의 사랑은 짧고 격렬했습니다. 청소부 출신 제드 존슨과의 사랑은 그중 가장 길었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납니다. 둘은 강아지를 함께 키우며 일상을 공유했지만, 영화 <배드>의 실패로 앤디가 제드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둘 사이는 금이 갑니다. 제드는 자살을 시도했고, 워홀은 놀랍게도 현장을 벗어나버렸습니다. 이후 제드는 집을 나갔고, 1996년 TWA800편 항공기 폭발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워홀은 “속이 후련하다”고 말했지만, 이후 11kg이 빠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내면의 허무감은 깊어졌습니다.
이후 만난 파라마운트 임원 존 골드와의 관계 역시 비극적이었습니다. 존이 에이즈에 걸려 앤디가 병간호를 하게 되었고, 30일간 그의 곁을 지켰지만 결국 이 관계도 종말을 맞습니다. 존은 33세에 세상을 떠났고, 워홀은 2년 후 담낭 수술 중 심장박동 이상으로 58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이후 유족은 병원을 과실치사로 고소했지만, 평생 건강과 외상에 시달렸던 워홀의 죽음은 사실상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워홀은 죽는 순간까지도 ‘행위 예술’로 기억되길 원했던 듯합니다. 친구 페이지 파웰은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향수 한 병과 잡지를 시신 위에 올려주었고, 관은 그렇게 닫혔습니다. 앤디 워홀은 ‘자기 자신을 그릴 수 없던 화가’였습니다. 그는 타인을 통해, 대중을 통해, 사랑하는 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려 했지만, 끝내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미술계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예술가였지만, 내면은 가장 불완전했던 인간. 워홀의 삶은 현대인의 초상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