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헐리우드를 대표했던 여배우 머나 로이. ‘완벽한 아내’의 이미지로 사랑받았던 그녀는 네 번의 결혼과 자원봉사, 정치 활동까지 시대를 앞선 삶을 살았습니다. 배우를 넘어 진보 정치와 인권에 헌신했던 머나 로이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봅니다.
1. “완벽한 아내”로 사랑받은 할리우드의 여왕, 머나 로이
머나 로이는 1930년대 헐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 중 한 명이었습니다. 특히 1934년 시작된 시리즈 영화 『마른 남자들』에서 그녀가 연기한 역할은 ‘완벽한 아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고, 그녀에게 ‘할리우드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한 세대의 남녀 관계에 세련된 시각을 제시하며 관객들의 공감과 찬사를 받았고, 이후 머나 로이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상징적인 여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중이 기억하는 머나 로이의 이면에는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 개인적인 상처들이 존재합니다. 그녀는 총 네 번 결혼했으며, 세 번 이혼했고 한 번은 사별했습니다. 첫 번째 결혼은 1936년 프로듀서 아서 홈블로우와의 관계였고, 1942년 이혼한 뒤에는 허츠렌트카 설립자의 아들과 결혼했지만 이 역시 두 해 만에 끝이 났습니다. 세 번째 남편은 영화 제작자 진 마키였지만 이혼으로 종결, 네 번째 결혼은 외교관 하울랜드 서전트와 맺은 것으로, 그는 1987년까지 그녀 곁을 지켰습니다. 비록 그녀는 자녀를 두지 않았지만, 전 남편들의 자녀들과도 사이좋게 지내며 따뜻한 인간관계를 유지한 점은 머나 로이의 인품을 보여주는 일화로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평생 자연스럽고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사랑받았습니다. 키 168cm, 몸무게 54kg를 평생 유지한 그녀는 당시 여배우들 가운데서도 매우 세련된 스타일을 자랑했으며, 특히 고양이 같은 이목구비로 유명했습니다. 그녀의 매력은 단지 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절제된 연기와 깊은 감정 표현으로 관객을 사로잡았습니다.
2. 어린 시절부터 예술로 향한 여정, 그리고 배우로서의 성장
머나 로이는 1905년 미국 몬태나주 헬레나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은행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였고, 젊은 나이에 몬태나 주 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시카고 음대 출신으로 예술적 감각이 풍부한 여성이었죠. 로이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무용에 노출되며 예술 감성을 키웠고, 특히 댄스에 남다른 흥미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아버지는 그녀의 예술 활동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후 가족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게 됩니다.
캘리포니아는 머나 로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라호야 해변에서 병약했던 어머니의 건강이 호전된 후, 가족은 로스앤젤레스 인근 컬버시티에 정착했으며, 그곳은 당시 할리우드 영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머나 로이는 재정난을 겪던 가정의 도움을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연기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그녀의 첫 시작은 1925년 영화 『귀여운 소녀들』의 엑스트라였고, 그 현장에서 그녀는 훗날 스타가 되는 조앤 크로포드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녀의 외모는 당시 무성영화에서 흡혈귀 역할로 각광받기에 충분했고, 실제로 머나 로이는 다양한 호러·스릴러 영화에서 인기를 끌며 입지를 다졌습니다. 그러나 유성영화 시대가 도래하자 그녀는 잠시 주춤하게 되죠. 그러다 1934년 클라크 게이블과 함께한 로맨스 영화로 다시금 부활하며, 이후엔 로맨틱 코미디 여주인공으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1936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성 스타로 선정되며 그녀의 명성은 절정에 이릅니다.
3. 헐리우드 배우를 넘어 사회를 변화시킨 지성인, 머나 로이
머나 로이의 삶은 단지 배우로서의 명성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사회적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진보 정치와 인권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녀는 수백만 달러의 전쟁 채권을 모금했고, 유네스코 미국 국가위원회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는 등 할리우드 배우로는 최초로 국제 기구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머나 로이는 민주당 루즈벨트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당시 퍼스트레이디 엘리너 루스벨트와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녀는 엘리너를 가장 이상적인 여성으로 추앙했고, 집에는 엘리너의 사진을 걸어두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녀는 배우를 넘어 ‘지성인’, ‘시민운동가’로서의 면모까지 보여주었습니다. 말년에 그녀는 주택 차별 반대 위원회의 공동 의장으로 활동했으며, 이는 미국 내에서 평등과 정의를 위한 진보적 활동에 깊이 관여한 것을 의미합니다.
1970년대 후반, 그녀는 유방암 진단을 받고 두 차례 수술을 받지만 꿋꿋하게 삶을 이어갑니다. 1991년, 그녀는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하면서 다시금 대중의 기억 속에 등장했고, 이 수상은 그녀의 마지막 공식 석상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뉴욕에서 조용한 노후를 보내다 1993년 88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그녀는 베티 데이비스처럼 드라마틱한 재능을 갖추진 않았고, 라나 터너처럼 섹시한 이미지를 내세운 배우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절제된 우아함, 자연스러운 여성성, 그리고 지적인 품격으로 자신만의 독보적인 매력을 구축하며 대중과 평론가 모두에게 꾸준히 사랑받았습니다. 머나 로이는 배우이자 활동가로서 진정한 ‘할리우드의 품격’을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